군화의 불안
고등학생 때 시작한 연애가 4년을 넘게 이어질 줄은 몰랐다. 그리고 그 시간 동안 아무 문제 없던 우리가 헤어지게 될 줄도... 다른 대학을 가게 되었을 때조차도 다툼 없이 잘 사귀던 우리인데, 네가 군대를 가고, 대화가 부족해지니 점차 문제가 터져나왔다.
예전처럼 힘들지도 않고, 휴대폰도 있고, 휴가도 자주 나올 수 있으니까 같이 이겨낼 수 있다고 생각했다. 실제로 입대 초반에는 괜찮았다. 목소리를 들을 때마다 네가 보고 싶어서 울기도 하고, 서로가 옆에 없는 동안에 보내는 일상이 어떤지 이야기 하느라 할 말도 많았다.
첫 휴가 때는 정말 한치도 떨어지지 않았고, 복귀하는 날에는 너에게 안겨서 몇 시간을 보내고서야 놓아줄 수 있었다. 위병소 앞에서 네가 사라질 때까지 보고서야 발걸음이 떨어지고, 집에 돌아와서도 얼굴이 아른거려서 한동안은 후유증이 남아있기도 했다. 그리고 그건 참 지치는 일이었다.
군대에 간 너와 보낼 수 있는 시간은 한정되어 있었다. 자연스럽게 난 주변 인간관계에 신경을 쓰기 시작했고, 네가 있을 때는 가끔씩 얼굴만 비추던 자리에 참석하는 횟수가 늘었다. 대학모임과 술자리가 반복될수록 네가 모르는 내 친구들과 남사친이 늘어났다. 그때마다 네게 말을 해줬지만, 어느날 네가 불안하다며 내게 털어놓았다.
이해할 수 있었다. 네 주변에 여자가 늘어난다면, 나였어도 불안했을 테니까. 미안하다고, 주의하겠다고 했지만, 이미 만들어진 인간관계를 줄이는 일이 쉬울리가 없었다. 최대한 남자가 적은 곳, 꼭 참석해야 하는 일정이 아니면 잘 나가지 않았다. 그러나 그게 해결책은 되지 못했다. 네게 이미 생긴 불안을 해결할 방법을 몰랐고, 내가 전화를 못 받을 때면 너는 의심을 했다.
의심에 지쳐가다, 한번은 내 친구들을 소개시켜 주기로 했다. 몇 시간 동안 이어진 자리의 분위기는 좋았었고, 그대로만 간다면 너도 좀 안심이 될 줄 알았다. 그러던 중 친구 하나가 그랬다. 내가 힘들어하니 그만 괴롭히라고. 장난스러운 어조였지만, 공기가 순식간에 싸늘해졌다. 급하게 자리를 끝내고 집에 같이 돌아가는 길, 네 눈치가 보여서 아무말도 하지 못했다. 우리 집 앞에 도착하고 나서야 네가 입을 열었다.
나랑 사귀는 게 힘드냐고 물었다. 절대 아니라고 했지만, 친구들에게 그런 말을 털어놨다는 점에 이미 상처를 받았나보다. 화내는 것도 이해했다. 다른 사람의 입에서 그런 말을 듣는 네 심정이 얼마나 고통스러웠을까. 그래서 설명을 해줬다. 여자친구가 어떻게 해줘야 남친이 불안하지 않을까 물어보는 과정에서 나온 말이라고.
너도 그동안 쌓인 게 많았는지 이야기를 하나 둘 꺼내놨다. 전화를 안 받을 때마다 얼마나 불안한지, 처음에는 전화만 해도 좋아했는데, 요즘에는 빨리 끊으려고 한다는 점이나, 내가 변한 것처럼 느껴지는 부분들을 말했다. 그런 말을 들으면서 나도 감정이 폭발했다. 떳떳하니까 친구들도 소개시켜주고, 누구를 얼마나 만나러 가는지도 다 알려주는 건데, 내가 얼마나 더 해야 네가 괜찮겠냐고 화를 내버렸다.
지금 생각하면 서로 조금만 더 생각했으면 넘어갈 수 있는 문제였는데, 그날은 싸운 상태로 헤어지고, 너는 다음 날 복귀를 해버렸다. 그 뒤로는 큰 의미가 없는 대화의 반복이었다. 누구하나 사과하지 않고, 아무렇지 않게 지내려고 하는 일상. 긴 대화를 하는 날은 거의 없었고, 형식적인 질문과 답의 반복만 이어지는 나날이었다.
그러던 어느날, 네가 휴가를 나왔다고 했다. 만나서 말 없이 집 근처 아파트 단지를 뱅뱅돌았다. 아직도 그때랑 생각이 똑같냔다. 고개를 끄덕이니 같이 이겨내자고 하더니 권태기가 왔냐고 묻는다. 그런 것 같았다. 예전처럼 네가 좋았다면 고개를 끄덕일 게 아니라 말을 했을 테니까. 너도 그걸 알았는지 무슨 말이라도 해보라고 했다. 눈물을 흘리면서.
그런 모습을 보면서도 별 감정이 들지 않았다. 정말 이별을 해야겠다고 생각한 이유다. 너는 계속 불안해하고, 의심하는데, 나는 그런 감정을 풀어주기 위해 노력하는 게 지친다고 했다. 서로 신경 끄고 살면 편하지 않겠냐고 물어봤다. 미안하다고, 잘하겠다면서 우는 너를 말 없이 지켜봤다.
한참을 이야기 하다가 너도 이별을 받아들였다. 그래도 제대하고 연락하면 한번만 만나달라길래 알겠다고 했다. 지금이면 제대하고 몇 달이 지났을 텐데, 아직 연락은 없다. 둘다 스트레스 받는 것보다는 좋은 선택이었다고, 너도 그렇게 생각하니까 아직 연락이 없는 거겠지. 누구랑 헤어진 경험이 너뿐이라 가끔 이렇게 생각이 난다.